본문 바로가기
혼자서도 잘 써요/안 본 눈으로 명작 읽기

애니 <하이큐> 1기 리뷰

by Wrinvetor 2022. 1. 15.



하이큐... 와, 어떻게 이제야 이걸 봤을까 싶을 정도로 정말 너무 재밌다. 재밌는 정도가 아니라 감동적임.. 스포츠물을 이렇게 몰입해서 봤던 적이 없는데. 그간 안 본 유명 스포츠물을 섭렵해보고 싶고, 남들이 좋다 좋다 하는 고전들을 일이 아니라 재미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이었다. 애니 연출도 너무 좋지만 원작에 대한 칭찬이 워낙 자자해서 원작도 봐야겠다. 운동성을 대체 어떻게 구현했을지 불안하면서도 궁금해진다.

밸런스가 정말 좋은 만화다. 캐릭터 디자인과 성격과 경기 내 포지션 배치의 밸런스가 놀랄 만큼 좋다. 이렇게 인물이 많고 와글와글한데 겹친다는 느낌도 없고, 오히려 매력적인 인물이 대거 쏟아진다. 딱 봐도 파는 맛이 보통 아니겠어...

재능이라든가 노력이라든가 협업 같은(연달아 하이큐만 봐서 한국말도 좀 일어 같이 하게 됨) 스포츠만화에 관해 할 법한 고민들뿐만 아니라 승부나 스피드 같은 스포츠만화에서만 할 수 있는 고민들을 가능하게 하는 작품이다. 나는 노력, 능력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은유로 받아들여 내 얘기 삼는 버릇이 있고, 그에 관해선 거의 어떤 장르 어떤 작품에서든 다뤄지고 있기 때문에 무얼 보든 피해가는 법이 없다. 예술 분야에 관한 것들은 말할 것도 없어서 나와는 상관 없는 음악이나 미술 분야에서도 나 자신을 투영해 보곤 한다.

하지만 하이큐를 통해 스포츠는 확실히 나랑 완전히 다른 분야라는 걸 매화 실감하고 있다. '순간'에 '승부'를 봐야 하는, 속도와 위력이 중요하고 이기고 지는 것이 실재하는 세계에 관한 이야기에 처음으로 몰입해 본 것 같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현장에서 단판에 결정 짓지 않는다는 것, 싸움의 대상이 어쨌든 나라는 것, 사실상 승패 같은 건 없어서 목표점을 둔 질주가 아니라 여행이나 모험 같은 것이라는 점. 바로 이 점들 때문에 글쓰는 일을 하게 된 현재에 언제고 안심하는 나로 하여금 (무려) 아쉬움을 느끼게 한 것이다! 누워서 관람하는 주제에, 왜 선수들이 흥분하면 나까지 불끈불끈해지는 걸까? 몸이 뜨겁고 숨이 턱 막힐 만큼 신체를 물리적으로 한계에 몰아붙인 상태에서 느끼는 쾌감, 몸에서 몸으로 현장의 공기로만 전해지는 감각이란 것을 나 또한 경험해보고 싶고, 그런 것들만큼은 결코 글 쓰는 일에선 존재할 수 없는 일이어서 조심스레 아쉬움이 들었던 것이다. 주책인가. 여튼 왜 미국 중산층이 자녀 교육으로 스포츠를 빼놓지 않는지 알 수 있게 되는 만화였음.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할까, 싶으면서도 '열혈'은 아니지만 내게도 오래 지속되는 열기가 있음을 떠올렸다. 하이큐가 멋진 또 하나의 이유는, 앞에서 얘기했듯 매력적인 인물들이 엄청나게 많이 나오고 그 모든 인물들이 각자의 장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장기란 것은 그 사람 성격이나 신체적 특징, 다른 팀원들과의 관계성이 반영된 총체적인 결과물이다. 매치 형태와 그 밖의 상황에 따라 완벽한 무적은 없다는 사실이 어쩔 수 없이 반가웠다. '현 고교 대회에 이렇게 천재가 많다고???' 하고 보면서도 상대적이고 유동적이란 것을 계속 상기시켜줘서, 여러모로 스포츠도 삶도 호락호락하게 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자각시켜줘서 좀 더 편한 맘으로 보게 된다.

인터하이 1회전에서 아주 많은 엑스트라들, 1회전을 통과하지 못하는 특징 없어 보이는 학교의 선수들을 그려낸 편도 그래서 좋았다. 교차 편집하는 연출도 적절하다 생각했고, 내용상 꼭 필요하다고 생각됐다. (하이큐를 보기 전 주변인들로부터 얘기를 들은 적이 몇 번 있다. 우연인지 통계인지 그때마다 다들 자신은 츠키시마를 좋아한다고 밝혔는데, 그 이유가 하나같이 히나타와 카게야마와 달리 천재가 아니어서 그렇다는 점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다. 재능의 한계를 알기에 차라리 전력을 다하지 않는 쪽을 택하는 마음을, 범인(凡人)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을 테니까. 결국 그런 츠키시마가 진심을 먹기로 결심하다니, 아직 보진 않았지만 그 장면 역시 왜 다들 열광하는지도 벌써 알 것 같다.)

질 줄 알았는데 이기고 이길 줄 알았는데 지고. 정석적인 것 같으면서도 극의 흐름을 노련하게 비틀어서 정말 재밌다. 만화 속 인물의 강력함이 쿠궁! 하고 등장하면 모두가 충격을 받아 시선을 모으는 장면들은 언제 봐도 쾌감이 쩐다. 예상 외의, 예상 이상의 힘을 보여주는 장면은 왜 봐도 봐도 좋을까. 괜히 내가 뿌듯해서 '우리 팀'이 회심의 미소 지을 때 나도 같이 썩소를 짓게 된다. (썩소라니, 이 표현 요즘은 안 쓰지?) 어쩔 수 없이 카라스노를 응원하게 되는데, 스포츠 보면서 한국 응원하는 건 국뽕이 아니라 시점의 문제였나보다.

한편으론 문득문득 작가의 능력이야말로 이 배구 선수들만큼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학교 다닐 때 배구 선수였다는데 뭐 이리 만화를 잘 그렸지? 선수였을 땐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마도 나이가 들어서거나 경험이 많아서가 아니라 정말로 단지 성격 탓일 텐데, 신나서 보다가도 한 번씩 괜한 상상을 멈출 수가 없다. 주요 선수로 언급되지 않은 인물들은 배구 계속 안 하려나? 저기서 엄청 강하다고 나온 인물 중에도 나중엔 안 하는 사람이 나오겠지? 이렇게 날고 기어도 지금 이거 현 대회니까 이런 정도 하는 사람들이 드글드글하단 거겠지? 거기다 한 세대잖아, 이건. 프로로는 몇이나 데뷔할까. 이런 선수가 매년 쏟아져서 서로 경쟁하는 거 아냐? 국대로는 이 중 누가 뽑히는 거야? 자꾸 천재라고 하는데 정말 전부 다 천잴까? 괴물같이 잘하는 애들 중에 나중에 부상으로 은퇴하는 애도 나오겠지? 꽤 잘하는 애들 중에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게 되는 애도 있을 거고, 고교 배구부 감독이 되는 사람도 있겠지? 여기 나온 코치 친구들처럼 가게 셔터 내리고 운동 나오려나? 그때 우리 정말 좋았지, 하고 아련하게 말하게 되는 거야?

뭐 이런 생각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데, 쓰고보니 나 자신도 징그러워질 정도다. 그냥 봐!라고 생각해도 물론 되지 않지만... 그래도 다이치와 스가의 바다같이 넓은 도량을 보고 있자면 이 녀석들 어떻게든 잘 살아가겠구나, 분명한 신뢰가 생기는 것이다. 전직 배구 선수로서 셔터를 내리든, 만화를 그리든, 벤치에 앉아 남을 케어하든, '열혈'히 뛰었던 한 시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21.10.17.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