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1월 25일 동아일보에 김광주가 <작가와 독자와의 거리>를 논하면서 인용한 당대 작가들의 말
"일선지구멜 며칠 돌아보았더니, xx사단장은 참 놀라운 사람이더군!
글쎄, 나의 작품을 장편 단편할 것 없이 모조리 빼놓지 않고 읽고 있는 애독자란 말야!
그래서 어떻게 후대를 해주는지 정말 이 편이 도리어 민망할 지경이었어!"
"종점에서 합승을 타려고 차에 올랐더니 좀체로 저원 다섯 명이 차질 않아서 십여 분이나 기다리는 동안 앞에 앉아서 손님이 타기를 기다리고 있는 운전수가 무슨 책을 열심히 읽고 있기에 넌즛이 넘겨다 보았더니 바로 나의 장편소설 xxx를 읽고 있지 않겠나?
독자란 참말 상상도 못할 곳에도 있는 거야!
이런 독자를 위해서도 우리는 작품을 쓸 필요가 있지!"
"어제 밤에는 통금시간이 삼십분이나 지나서 파출소에 걸려 들었어!
하마토면 <세멘트> 바닥에서 하루밤을 새야 하는 것을 취했던 술도 오싹 깰 판인데, 저편 구석에서 난데 없이 내닫는 젊은 경사 한 사람이 있겠지. 내 시민증을 보더니만 반색을 해서 손을 잡으며
선생님 작품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읽고 있읍니다만 왜이렇게 약주가 취하셔서 밤 늦게..?
간신히 차를 한 대 잡아주어서 집으로- "
경험상 독자 입장에서 꿈에 그리던 작가(최애)를 만날 때는 대개의 정보를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게 좋고,
적당히 좋아하는 작가를 만난다면 환호와 함께 응원의 말을 해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50년 전 증언들을 보며 일련의 흑역사경험이 좌르르...
그거 말고도 이 글은 전문이 좀 대체로 웃기다.
'야, 저 작가 꺼 읽어보니까 별 거 없던데?'를 영화관(씨네마 코리아) 갔다 실시간으로 듣는 유명 작가의 일화,
김광주의 아련한 서술 같은..
(작가와 독자 간의 거리란)
멀고도 가까운 것
가깝고도 먼 것
그러면서도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기도 하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말하는 평범한 표현이면서도 작가와 독자의 거리를 말함에 있어서도 이 말을 쓰는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작가에게 감격이나 우월감이나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독자가 과연 작가와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독자냐?
반드시 그렇지도 못한 것이다. 그러면 작가를 멀찍이 놓고 모른 체 하는 독자가 제일 작가와 먼 거리에 있는 독자냐?
이 또한 반드시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작가와 독자와의 거리는 과연 몇 미터나 되는 것이냐?
그리고 작가는 이 거리를 어떻게 측정해야 하는 것이냐?
(...) 어떻게 측정하고 작품을 쓰느냐?
하는 데서 한 작가의 개성, 작품의 품격, 심지어는 작품의 우열까지도 결정된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허지만 작가란 것은 본래가 오산의 명수다. 인생 그 전체가 오산의 명수(이것 때문에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이 존재한다고도 할 수 있지만)인 이상으로 작가란 것은 독자와의 거리를 측정하는 데는 기막히게 훌륭한 오산의 명수인 것이다.
(~ 上)
작가 개인의 의도와 아이덴티티와는 별개로, 독자와의 거리 속에서 형성되는 작가의 정체성(개성, 품격)이 다르고 선후관계가 뒤얽혀 어느 순간부터는 바로 그 독자와의 거리, 관계 속에서 창작해나갈 수밖에 없는. 즉 독자와의 관계가 곧 작가의 창작 활동을 상당 부분 주조할 수 있다는, 뭐 그런 얘기로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내 자신 역시 이 오산의 명수 중에서 또한 명수다.
소학생 시절부터 수학에 있어서 기막힌 열등생이던 나는 독자와의 거리를 메터수로서 측정할 재간은 없으며 단지 내가 생각하는 독자, 또는 작가와 독자 관계 같은 것을 평소에 느끼고 생각하고 있는 대로 몇 장 더 써내려 가기로 할 뿐이다.
김광주 씨 개그캐인 듯.
21.03.28 마저 읽기
읽기는 어제 밤에 다 읽었는데, 하편 전문이 생각보다도 너무 좋아서 전부 옮겨놔야겠다 싶어 오늘 마저 씀.
독자란 작가에게 있어서 가장 큰 희열이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나를 알아주고, 나와 호흡이 같고, 나의 사업을 알아주고 공감공명해주는 존재를 발견한다는 것은 비단 작가라는 직업에서뿐만 아니라 어떤 인생에 있어서나 희열이요, 감격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작가가 있다면, 혹은 (누가 독자를 생각하고 작품을 쓰느냐? 내가 좋아서 그냥 쓰는 것이지)하고 큰소리를 치고 내닫는 작가가 있다면 이것은 멀정한 그짓말이다.
소설이라는 것이 작가 개인의 자아도취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마음대로 끼적어려가지고 자사방벽에다 붙여놓고 혼자만이 울고 웃고 하는 일종의 벽보가 아닌 이상에는 써놓은 것을 읽어주는 독자가 없이는 | 상대방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작품을 현실에서 이해해주고 읽어줄 사람은 없는 것이다. 나 좋아서 써두면, 내가 죽은 뒤 억천만 년 뒤, 내가 관 속에서 다 썩어 없어진 뒤라도 진리는 나타나고, 세계 문학사상에 걸작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현실의 독자를 완전히 안중에 두지 않는 고고하고 숭고한 작가의 태도도 우리 주위에는 있다.
(읽고 싶은 놈은 읽을 것이고, 읽기 싫은 놈은 고만 둘 것이고, 나같이 어려웁고 고상하고 지성적이고 우월한 예술 작품을 똑바루 이해할 독자는 현실에는 그다지 많지 못하다. 자동차 운전수나, 캬바레 여급 가운데는 나의 독자가 없어두, 대학생, 대학교수, 인테리들 가운데는 나의 위대한 독자가 있는 것이다. 다만 하나의 독자를 위해서라도 나는 내 작품을 쓰면 된다!) 이런 소위 순수하다는 문학정신으로서 창작의 붓을 들고 있는 거룩한 작가들도 우리 주위에는 얼마던지 있다.
양자가 다같이 예술에 있어서 마스터뻬이슌적인 태도인지 아닌지는 논하지 않기로 한다손 치더라도, 억천만년후에 이런 위대한 작가를 알아줄 수 있는 것도 역시 이 작품을 우선 읽어봐야 할 독자일 것이고, 또 극소수의 대학 교수도 독자임에는 틀림 없는 것이며, 이 극소수의 대학교수만이 지구 위의 가장 위대한 독자라는 논리도 성립될 수는 없는 것이다.
소설은 우선 남에게 읽히자고 쓰는 것이다. 혼자만이 읽고 혼자만이 벽에다 부쳐도고 바라다 보자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읽힐 바에야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 두 사람보다는 세 사람, 세 사람보다는 더 많은 사람이 읽어주기를 바란다. 이것은 작가의 공통된 심리요 태도다. 이것을 무시하고 자기의 예술만이 위대하다고 발악을 하며 독자를 전연 도외시하고 고고한 체 하는 것은, 마치 청중이 한 사람 없어도 상관없다고 텅 비인 시공관 스테이지에서 의자만 내려다보며 혼자서만 목청을 뽑고 도취해 있는 음악가와 꼭 같은 존재다.
목청을 뽑을 줄 알고, 악을 쓸 줄 알고, 스테이지에 슬 줄을 아니까 성악가임에는 틀림 없으나, 그렇다고 청중이 한 사람도 없다는 성악가는 우리는 상상할 수 있을 것인가!
이와 반대의 경우를 우리는 또한 뚜렷히 보고 있다.
독자와의 거리를 너무나 현명하게 측정하려는 작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자기의 독자를 강제소집시키려고 그 줄을 앞으로 앞으로 잡아채고 있으며, 이렇게 하면 아무리 원거리에 있는 독자라도 자기에게 딸아오리라는 자신만만한 작가의 태도도 있다.
이것은 특히 오늘날의 신문소설에 있어서 가장 현저한 경향이며, 작가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는 데는 오늘날 한국의 쪄너리즘이란 것이 그 일반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이런 인물을 내세워 이렇게 꾸며놔두? 이렇게 인물관계를 얼키설키 자미있게 얽어놔두 아니 읽겠다는 거냐?) (요렇게 교묘하고 아깃자깃하게 끊어놔두 내일 신문을 아니사보겠다는 거냐?)
(이렇게 흐뭇찐 여자의 육체를 내놓고 발가를 벋기어 뵈주어두 독자가 나를 아니 딸아오고 내일 신문의 소설을 고대하지 않겠다는 거냐?)
이런 용감무쌍한 태도와 정신으로 독자와의 거리를 밧싹밧싹 잡아다리려고 악전고투를 하고 있는 작가를 우리 주위에서는 또한 얼마던지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독자는 현명한 것이다.
또한 독자란 작가 이상으로, 때로는 얼치기, 엉터리 평론가 이상으로 무서운 존재다.
가까운 거리에서 박수를 치고 찬사를 보내고 꽃다발을 보내는 독자만이 가장 작가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독자는 아닌 것이다.
또 멀리 떨어져서 말없이 두고만 끔적끔적하고 있는 독자라고 모두 작가와 거리가 머언 독자는 아닌 것이다.
(아, 참, 요새 선생의 신문소설 정말 아슬아슬하게 끝을 맺으셨더군요! 그런데 그 라스트에는 좀 불만이 있에요! 왜 여주인공을 죽게 만드셨에요? 결혼을 시키는 거지요!)
이런 여성독자라구, 그것이 작가를 이해하는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독자는 절대로 아닌 것이다.
제일 무서웁고 두려운 독자.
멀리 앉아서 작가를 응시만 하고 있으면서도 그 작가의 호흡을 알고, 평론가 이상으로 냉정무사한 판단력을 가진 독자. 항상 이런 무서운 독자들의 시선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 느끼면서 씨네마 코리아의 휴게실에를 나타나는 도리밖에 작가에게는 다른 거리측정법이 없을 것 같다.
이 블로그 이름이 '쓰기에 관해 쓰기'이기는 하지만, 사실 내게 '쓰는 나'는 훨씬 더 개인적인 자의식에 가깝고 현실적인(?) 실제적인 정체성으로서는 보고 듣고 읽는 쪽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비평을 써서가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독자이자 청자이자 관객, 그러니까 대중.
이번 학기 수업 자체가 신문-대중소설에 관해서기도 하고, 지난 주에도 50, 60년대 대중문학과 대중에 대한 이러저러한 생각들을 많이 엿봤는데, 아무래도 통속성과 결합해 부정적이고 저속한 쪽으로 해석되는 쪽이 대부분이다.
(글에 관해서는 아무래도 좀 더 이런 저런 생각들이 들기는 해서) 좀 더 순수하게 대중으로서 있게 되는 쪽은 음악에 관해서인데 최근 오래 들어온 창작자들이 내놓은 저마다의 앨범을 보면서 들었던 이러저러한 생각들이 이 기사문을 읽으며 새삼 또 한 번 상기되었다.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둔 여러 작품들 속에서, 어떤 작품은 지극히 '대중적'이라는 이름 하에 굉장히 전형적이고 해석의 여지가 없는, 그렇지만 모두의 귀에 자꾸만 감기는 쪽이었는데, '대중적'인 많은 작품들이 그것의 퀄리티와 개성에 대한 의혹으로 흥행이 의아할 때 우리는 결국 대중을 의심하게 되는 것 같다. 모든 대중에게는 '대중'에 대한 불신이 있다. 나 역시 그렇고. 그런데 내가 언급한 해당 작품을 듣고 있자면, 이런 작품이 이렇게까지 성공하다니 (좋아하는 표현은 결코 아니지만 말하자면) '대중의 수준이 수준급'이지 않나? 싶은 것.
요지는, 어떤 작품은 '상향된 대중'을 만나게 하는데, 그게 대중을 끌어 올렸다기보다는 폄하적 의미의 대중에 가려져 다들 모르고 있던 어떤 '대중'을 '발견'해냈다는 느낌인 것이다. 그간 '대중성'이란 이름 하에 헐거운 완성도로 범람했던 작품들에 스스로가 규정되었던 것에 대중으로서 억울한 마음이 들 정도로, '우리는 대상만 있다면 이런 것을 좋아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맥락에서 50, 60년대 대중성과 신문소설에 대한 비판의 논리 아래 거듭 쓰였던 표현 '대중에 영합하다'는 새삼 다르게 읽힐 필요가 있다. 문제는 대중에 영합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대중과 어떻게 영합하느냐 하는 것. 창작자의 작품은 대중성을 규명하는 동시에, 자신이 규명한 대중성이 곧 자신의 작품을 주조한다. 대중에 대한 겸허하고도 진지한 태도가 창작자의 숙명이자, 책무이자, 권리가 되는 이유다.
'공부 좀 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상정, 만화학의 재구성(이숲, 2021) (0) | 2022.01.04 |
|---|